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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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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존하는 문헌들에서는 부천의 역사를 대체로 고구려시대부터 기술하고 있다. 지금 부천을 포함하는 전통시대의 부평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각종 사서에 고구려의 주부토(主夫吐)로 기록되어 있다. 주부토는 문헌에 나타나는 부천 지역에 대한 최초의 지명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삼한시대 마한 54 소국의 하나인 우휴모탁국(優休牟琢國)을 부천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 주부토는 고구려의 지명으로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었던 시기는 475년(장수왕 63)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일대를 차지한 때로 보인다. 그 이전에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인근 지역인 인천의 옛이름이 백제의 미추홀이었던 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누리다가 6세기에 들어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불안이 거듭되었다. 이때를 틈타 백제와 신라는 551년(진흥왕 12)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부천 일대의 한강 하류 지역은 백제가, 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가 분할 점령하였다. 553년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급습하여 백제군을 몰아냄으로써 한강 유역 전체를 독점하였다. 부천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에도 여전히 주부토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부천은 당시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음에도 757년 장제군(長堤郡)으로 개명되기까지 이 지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팽창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687년(신문왕 7)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지방 거점 5곳에 소경을 설치하여 9주5소경제가 완성되었다. 또 757년(경덕왕 16)에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행하면서 그 작업의 일환으로 전통적인 지명들을 그 음이나 뜻에 의거하여 모두 한자식으로 변경하고, 주군ㆍ현간의 영속 관계를 정비하여 지방제도를 더욱 조직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부토군도 장제군이라는 한자식 지명으로 변화되었다.
  • 삼국통일 후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는 경덕왕대를 고비로 점차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9세기 말 견훤과 궁예가 각각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궁예는 강원도 지역을 기반으로 점차 한강 이남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898년(효공왕 2)에는 공암(孔岩)[지금의 김포군 양천] 검포(黔浦)[지금의 김포]ㆍ혈구[지금의 강화]등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차지하였다. 검포와 공암은 장제군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장제군도 궁예의 세력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종수정일 : 202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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